어쩔 수가 없다 (해고, 자본주의, 박찬욱)


어쩔 수가 없다

직장을 잃는다는 게 단순히 월급이 끊기는 일이 아니라는 걸, 저는 주변에서 지켜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바로 그 감각을 스크린 위에 올려놓은 영화입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이 작품, 영화를 본 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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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라는 도끼, 그리고 흔들리는 삶

영화는 유만수가 마당에서 가족과 바베큐를 즐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좋은 차, 반려견,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들. 일반적으로 이런 장면은 행복의 절정을 보여주는 연출로 읽히지만, 제 경험상 이런 도입부가 나올 때는 반드시 추락이 따라옵니다. 박찬욱 감독은 그 낙차를 계산해서 설계합니다.

그 행복의 상징이었던 장어 선물이 사실은 해고의 전조였다는 반전은, 보고 나서도 한참 씁쓸했습니다. 미국계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가 회사를 인수한 뒤 단행한 구조조정의 결과입니다. 사모펀드란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투자 형태로, 고용 안정보다 수익률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만수는 경력이 길다는 이유로, 다시 말해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잘려 나갑니다.

아내 미리는 해고 소식에도 침착합니다. 집을 팔고 전세로 옮기자는 현실적인 제안을 내놓으며 남편의 새 출발을 독려합니다. 하지만 만수는 아홉 살부터 잦은 이사를 다녔던 기억 때문에 집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합니다. 3억이 넘는 대출금을 안고도 그 집을 팔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면은 남자의 허세로 읽히지만, 저는 조금 달리 봤습니다. 이건 집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삶의 형태에 대한 마지막 저항입니다.

영화에서 '도끼(Axe)'는 이중 기호로 작동합니다. 미국에서는 해고를 "해골에 도끼질한다"는 표현으로 씁니다. 한국에서는 "넌 뭐 하지?"라는 한마디로 같은 의미를 전달하죠. 도끼는 이 영화에서 해고이자 살인을 동시에 상징하는 모티프(Motif)입니다. 모티프란 작품 전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주제를 강화하는 상징적 장치를 뜻합니다.

경쟁자 제거라는 블랙 코미디, 그 안의 진짜 비극

구직에 실패를 거듭하던 만수는 결국 제지업계에서 유일하게 잘 나가는 회사 '문재'에 취직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경쟁자들을 직접 제거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솔직히 처음 이 설정을 들었을 때는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웃음과 불편함이 동시에 밀려옵니다.

만수의 제거 대상은 세 명입니다.

  1. 구범모 — 아내에게 벌레 취급을 받으며 재취업을 준비하는 알코올 중독자
  2. 고시조 — 일본 경력을 가진 제지업계 베테랑이지만 현재는 구두 매장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인물
  3. 최선출 — 문재 회사의 네임드 반장. 셋 중 유일하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

만수는 허위 구직 광고를 내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받아 등급을 매기고 제거 대상을 추립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장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소품, 조명, 배우의 동선이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는 연출 방식을 뜻합니다. 만수가 이력서를 펼쳐놓고 점수를 매기는 장면은, 그가 이미 시스템의 논리를 내면화했음을 공간 연출로 보여주는 미장센의 전형입니다.

그런데 이 블랙 코미디(Black Comedy)가 뼈아프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블랙 코미디란 비극적 현실을 웃음의 형식으로 포장해 더 날카롭게 전달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만수가 제거하려는 이 세 사람 모두 만수와 똑같이 수십 년을 종이밥 먹으며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구범모 내외와의 총을 두고 벌이는 몸싸움, 고시조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동질감, 최선출과의 만취 장면. 제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도 바로 그 최선출과의 음주 신입니다.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리얼한 만취 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만수는 취약한 알파남(Alpha Male)의 전형입니다. 알파남이란 집단 내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는 남성을 일컫는 말로, 이 영화에서는 그 지위가 박탈된 이후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이병헌은 행위는 공감할 수 없지만 동기는 이해 가능한 그 미묘한 선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연기는 쉬운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극도로 어렵습니다. 관객이 혐오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영화의 정서적 중심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역할은 배경으로 소비되기 쉬운데, 미리는 다릅니다. 현실주의적인 판단으로 가족의 방향을 잡고, 경이로운 회복력으로 남편을 들었다 놨다 하는 존재감이 발군입니다. 박희순, 이성민, 차승원의 조연 연기도 각자의 기묘한 면모를 순간적으로 터뜨리고 퇴장하는 방식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의 정체, 그리고 다가오는 어두운 시점

영화 제목 '어쩔 수가 없다'는 극 중에서 주문처럼 반복됩니다. 미국 본사도, 만수도, 새로운 고용주도 모두 이 말을 씁니다. 그런데 영화가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수에게는 집을 팔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는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키려 했던 삶의 형태를 위해 폭력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더 엑셀(The Ax)'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소설을 한국의 현재로 옮겨왔습니다. 배경이 바뀌었을 뿐, 이야기의 핵심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제 경험상 이런 번안(飜案)이 성공하려면 원작의 구조는 가져오되 감정의 결은 완전히 새로 짜야 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그걸 해냈습니다.

영화는 만수 부친의 베트남전 참전 이야기를 은유로 씁니다.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도 산업이요, 쓸어버리는 것도 산업이라는 냉혹한 순환. 사회는 필요할 때 역할을 주고 필요가 사라지면 버립니다. 이건 베트남전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AI와 자동화로 인한 노동 시장의 구조 변화는 특히 중간 숙련 직종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지업, 제조업, 유통업처럼 수십 년을 몸으로 버텨온 산업일수록 그 충격은 더 빠르게 옵니다.

만수는 결국 마지막 면접에서 합격합니다. 불 꺼져가는 공장에서 쾌재를 부르는 그 장면이 뼈아프게 슬픈 이유는, 그가 거기 도달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관객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정밀한 악마적 재능을 가졌다는 말이 이 장면에서 가장 적확하게 느껴졌습니다. 제 마음속 명예 전당에서 가장 높은 선반은 여전히 '헤어질 결심'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그 바로 옆 자리를 충분히 차지할 작품입니다. 자동화와 노동자 문제를 다루는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우리는 열심히 일하면 빛나는 결과를 얻는다는 믿음으로 길러졌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의미해지는 시점이 생각보다 빨리 오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원작 소설과 얼마나 다른가요?

A. 원작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미국 소설 '더 엑셀(The Ax)'로, 제지업계 실직자가 경쟁자들을 제거한다는 기본 골격은 동일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배경을 한국으로 옮기면서 아파트 대출, 가족주의, 중년 남성의 정체성이라는 한국적 감수성을 덧입혔습니다. 일반적으로 번안 작품은 원작의 그늘에 가리기 쉽지만, 이 경우는 한국 버전이 오히려 더 절박하게 느껴진다는 평이 많습니다.

Q. 이병헌의 연기가 왜 그렇게 주목받는 건가요?

A. 유만수 캐릭터는 공감할 수 없는 행위를 하면서도 관객이 동기를 이해할 수 있는 선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 균형을 깨면 단순한 악인이 되거나 과도한 연민을 유발하게 됩니다. 이병헌은 자기 카리스마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취약한 알파남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고, 특히 최선출과의 만취 장면은 기술적으로도 극히 어려운 연기입니다.

Q. 영화가 AI와 자동화 문제를 다룬다고 하는데, 직접적으로 나오나요?

A. 대사나 장면으로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지 산업이라는 배경 자체가 자동화의 직격탄을 맞은 분야이고, 만수 부친의 베트남전 참전 이야기는 시대가 달라졌을 뿐 노동자를 쓰고 버리는 시스템은 반복된다는 은유로 기능합니다. 영화는 이 문제를 고발하되 설교하지 않고, 블랙 코미디의 외피 안에 담아냅니다.

Q.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어떤 캐릭터인가요?

A. 미리는 단순한 내조자가 아닙니다. 해고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며 가족의 방향을 실질적으로 조율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역할은 남편의 서사를 지탱하는 배경으로 소비되기 쉬운데, 손예진은 미리를 독립적인 감정과 판단력을 가진 인물로 만들어냈습니다. 영화의 정서적 무게가 이 캐릭터에 상당 부분 실려 있습니다.

Q. 베니스 영화제 9분 기립박수가 실제로 있었나요?

A. 네, 2025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이 칸에서 주로 주목받았던 것과 달리, 이번 작품은 베니스에서 강한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영화제 반응만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건 경계해야 하지만, 이 경우는 완성도와 평단 반응이 함께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나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왜 우리는 직장을 잃으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낄까요. 만수의 비극은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도, 주변 사람들도,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도 그 질문 앞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가 불편하게 재미있고 재미있게 불편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전성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77Yes279d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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